이 블로그의 이전 글에서 이미 이 제목에 대한 답을 얻었을 것이다. 답과 별도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에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 조금만 더 들어가 보자.
6. 살리에리는 정말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했을까?
앞서 모차르트가 활동할 당시에는 살리에리의 위상이 모차르트보다 한 수 위였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살리에리는 황실의 궁정악장이었고 비인 음악계의 큰 손이었으며 그의 오페라는 흥행에 실패한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는 죽을 때까지 살리에리에게 도전장을 내민 도전자의 입장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인 상황과는 별도로 살리에리가 속마음으로는 모차르트를 질투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푸시킨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나 영화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가 바로 이런 캐릭터인데, 이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능력'을 심하게 질투한다.
살리에리가 실제로 모차르트의 능력을 부러워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살리에리가 남긴 말을 들어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살리에리는 분명 모차르트의 재능과 음악적 능력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과 질투하는 것은 당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살리에리를 비롯한 빈의 작곡가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 종종 '음표가 춤을 추는 곡', '음표를 정말 빽빽하게 집어넣은 곡'이라고 표현했다.
아시다시피 모차르트가 활동할 당시는 고전기 음악 양식이 절정에 있던 시기였다. 고전기의 음악은 장조 음계와 협화음 위주의 밝고 산뜻한 음향,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형식미, 장식음이나 불필요한 악구를 가급적 배제한 깔끔한 악상 진행 등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모차르트의 음악은 좀더 두텁고 대담한 화성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제가 제시된 후 복잡한 전개와 변화가 이어진다. 나중에는 여기에 대위법적인 경향까지 추가되면서 음악이 더욱 어려워졌다.
모차르트를 고전기의 음악을 심화시키고 낭만주의의 서막을 알린 작곡가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관점이고 당시에 회자되었던 음표가 춤을 춘다거나 음표를 빽빽하게 집어넣었다는 표현을 딱히 칭찬으로 보기는어렵다. 살리에리(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는 분명 모차르트의 능력을 인정했고 어려운 음악을 빠른 속도로 작곡하는 것을 보고 역시 천재답다고 감탄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모차르트의 스타일을 연구하거나 모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듣기 좋고 아름다운 음악이 미덕이었던 시기에 모차르트는 그냥 필요 이상으로 곡을 어렵게 쓰는 작곡가, 모난 성격 만큼이나 모난 곡을 쓰는 괴짜 작곡가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모차르트를 알게 된 후에도 살리에리의 음악 스타일은 딱히 큰 변화가 없었다. 이미 자기 음악이 잘 팔리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뭔가를 바꾸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는 모차르트가 오히려 살리에리의 영향을 받았는데,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나 마술피리 같은 오페라에서는 굴뚝 청소부(Der Rauchfangkehrer)를 비롯한 살리에리가 작곡한 희극 오페라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모차르트 입장에서는 좋건 싫건 흥행의 보증수표였던 살리에리의 작법을 참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푸시킨의 희곡과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질투의 화신 살리에리는 사실상 가공의 인물이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질투할 필요가 없었고 설령 질투했다고 해도 그의 음악에는 딱히 질투의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7. 모차르트의 사망원인
이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하지 않은 건 확실히 알겠는데, 그럼 모차르트는 어떻게 사망한 걸까? 오늘날 밝혀진 그의 사망원인은 병 + 과로이다. 모차르트는 죽기 약 2주 전에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고열과 두통 및 설사 등에 시달렸다. 하지만 일이 엄청나게 밀려 있어서 아픈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계속 작곡을 해야 했다. 원래부터 허약체질었던 사람이 이렇게 몸을 돌보지 못하자 결국 발병한지 2주만에 쓰러졌으며 그대로 사망하고 만다. 사망 직전의 상황을 보면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모차르트가 갑자기 헛소리를 하다가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으며 이때 몸 전체가 엄청나게 부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모차르트의 시신을 검사했던 의사는 성의 없이 그냥 '열과 발진, 사지의 통증으로 인한 사망'이라고만 기록했다. 물론 이 의사는 독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나중에 독살설이 불거진 후에도 중독의 흔적은 없었다고 못박았다. 사망 당시 모차르트가 걸린 병은 장티푸스나 폐렴 등으로 추정하는데 당시 기록에 있는 모차르트의 증상을 보면 특정 질병의 증세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2001년에 전염병 의학자 얀 허쉬맨(Jan V Hirschmann)은 모차르트가 생전에 돼지고기를 무척 좋아했다는 점에 착안해서 돼지 선모충에 감염되서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시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이 설은 거의 묻힌 상황이다.
사망 후 모차르트는 공동묘지에 여러 시신과 같이 묻혔는데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모차르트가 묻힌 곳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를 두고 모차르트가 사망시에 개인 묘지에 매장할 돈이 없었다거나 독살에 가담한 사람들이 전모가 밝혀질까봐 두려워서 일부러 시신을 찾지 못하게 공동묘지에 묻었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모두 엉터리 낭설에 불과하다. 그가 개인 묘지에 묻히지 못한 정확한 이유는 황제 요제프 2세의 칙령 때문인데, 요제프 2세는 당시 오스트리아 지역에 창궐했던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염병 환자 또는 전염병 의심 환자의 사체는 개인 매장을 금하고 반드시 공동묘지에 묻도록 했다. 이로 인해 당시 장티푸스 의심 환자였던 모차르트 역시 칙령에 의해 강제로 공동묘지에 묻혔던 것이다. 심지어 전염병(또는 전염병 의심) 사망자는 장례식을 치르는 것도 금지했기 때문에 모차르트의 유족과 조문객들은 묘지에 따라가지도 못했으며 결국 인부들이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해서 묻는 것으로 마무리해야 했다.
이 요제프 2세의 칙령 덕분에 모차르트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어디 있는지 오리무중이 됐으며 대신 그의 죽음과 관련된 소문만 엄청나게 양산되었다.
(1) 진혼곡의 의뢰자는 누구?
이전 글에서 모차르트가 마지막으로 작곡하고 있던 진혼곡을 익명으로 의뢰한 사람이 살리에리였다는 음모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실제 의뢰자는 빈의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크 백작(1763~1827)이었다. 그는 21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아내를 애도하기 위해 익명으로 진혼곡을 청탁했는데, 익명으로 청탁한 이유는 곡을 받아 자신의 이름으로 초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발제크 백작은 이전에도 남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는 짓을 여러 번 저질렀던 상습범이었는데, 이 때마다 작곡가의 입을 막기 위해 상당한 거액을 제시했고 모차르트에게 진혼곡을 의뢰했을 때도 의뢰비의 절반을 바로 지급하면서 재력을 과시했다.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에 아내 콘스탄체가 어떻게든 진혼곡을 완성하려고 동분서주했던 이유가 바로 이 엄청난 의뢰비 때문이었다. 한편 익명으로 거액을 주고 의뢰했다는 신비감(?)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의뢰자가 가면을 쓰고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독촉하러 자주 찾아왔다는 도시전설이 탄생했는데,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은 없었다.
결국 진혼곡은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에 의해 반 어거지로 완성된 후 1793년 "발제크 백작" 작곡의 레퀴엠으로 초연되었고 출판까지 이루어졌다. 하지만 빈 사람들은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발제크 백작이 이렇게 복잡한 대위법과 관현악 수법을 가진 곡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이름을 자주 도용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모차르트의 레퀴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차르트의 진혼곡은 살리에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참고로 살리에리는 오페라계에서 은퇴한 후에 직접 레퀴엠을 작곡했으며 본인의 장례식때 자신의 레퀴엠이 연주되었다.
(2) 살리에리가 죽으면서 했다는 고백은?
살리에리가 정신병원에서 종종 '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외쳤으며 죽기 직전에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주치의에게 고백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살리에리에게 음악을 배웠던 베토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하고.
하지만 살리에리가 병원에서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외친 것이 얼마나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소문은 있지만 실제로 그가 외치는 걸 들었다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살리에리가 실제로 그렇게 외쳤다고 하더라도 치매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문이다.
한편 당시 살리에리의 죽음을 지켜본 2명의 의사는 살리에리가 임종시에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고백한 적이 없다고 확인을 해 주었다. 애초에 살리에리가 사망할 때는 그런 말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시다시피 치매는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언어 구사 능력까지 사라지는 무서운 병이기 때문이다.
(3)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와 살리에리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는 이래저래 껄끄러웠지만 그가 사망한 후에 미망인이었던 콘스탄체와는 원만하게 지냈다. 콘스탄체 역시 모차르트의 독살설을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남편의 죽음을 지켜봤기 때문인지 이 음모론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살리에리는 대인배답게 콘스탄체가 모차르트 사후에 그의 작품을 모아서 출판할 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고 콘스탄체는 아들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 - 1844)를 살리에리에게 보내 음악교육을 받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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