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계속해서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에 대해 파헤쳐 보도록 하자. 이 글을 읽기 전에 꼭 이전 글을 읽어보기 바란다.
4.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악연
모차르트는 25살때인 1781년에 프리랜서로, 좀더 정확하게는 백수 상태로 빈(Wien)에 왔다. 이 시기에 살리에리는 자신의 첫 독일어 오페라 '굴뚝청소부'가 크게 성공하면서 빈 최고의 인기 오페라 작곡가로 부상하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빈에 온 직후 두 작곡가는 당시 14살이었던 뷔르템베르크의 공녀 엘리자베트의 음악교사 자리를 놓고 경쟁을 했는데 결국 인지도가 앞선 살리에리가 교사 자리를 차지했다. 이듬해에 두 사람은 같은 자리를 두고 다시 경합을 벌였는데 이 때에도 승자는 살리에리였다. 이 때부터 모차르트 살리에리의 악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시기 모차르트가 자기 가족이나 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에 대한 비난과 함께 그를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사실 모차르트는 한창 연주여행을 다녔던 10대 초반에 빈에 1년가량 머무르면서 오페라 작곡가로 데뷔하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빈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들의 텃세로 인해 결국 좌절된 경험이 있었다. 이 시절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모차르트는 성인이 되서 빈에 온 후에도 이 도시의 작곡가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음악활동을 방해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자주 드러냈다. 살리에리에 대한 적개심도 기본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1786년에는 살리에리와 오페라 작곡대결을 벌였다. 오스트리아 황실의 주선으로 두 작곡가가 자신의 작품을 황실 극장에서 동시에 상연하고 관객들의 평가에 따라 승패를 가리기로 한 것. 이 때 모차르트는 Der Schauspieldirektor(공연 기획자), 살리에리는 Prima la musica e poi le parole(처음에는 음악으로, 다음에는 말로)라는 희극 오페라를 상연했는데 관객들의 평은 대체로 살리에리의 우세였다. 당시에는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느라 매우 바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대결에 신경을 쓰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여튼 모차르트 입장에서 기분 좋은 결과는 아니었다.
1년 후인 1787년 12월에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에게 황실 작곡가(Kammermusicus)라는 타이틀을 부여하면서 연 800 플로린의 급여를 지급하기로 한다. 전임 황실 작곡가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이 이 해에 사망하면서 후임 작곡가로 선임된 것. 이 Kammermusicus는 살리에리와 같은 정식 황실 작곡가는 아니고 빈의 유명 작곡가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는데, 다만 필요할 경우에는 황실을 위해 작곡을 한다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 궁정악장으로 취임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돈만 챙기면서 황실의 요청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으며 이런 생각은 다른 궁정 음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황실 작곡가다운 품위를 보이지 않고 언행이 저급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이런 불만을 접하고도 딱히 성의 있는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실 음악가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새 황제 레오폴트 2세(1790년 즉위)에게 자신을 추천해 주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등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였다. 모차르트는 일반 학교 교육이 아니라 천재교육을 받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자기중심적이었고 인간관계에 서툴렀다는 것을 상기하자.
오스트리아의 황실 작가이자 빈 최고의 오페라 대본 작가였던 로렌초 다 폰테를 놓고도 두 작곡가는 갈등을 빚었다. 모차르트는 당시 마땅한 오페라 대본을 구하지 못해서 다 폰테의 대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우선순위는 언제나 궁정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원하는 시기에 다 폰테의 대본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와 다 폰테가 함께 한창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공연 작업을 하는 와중에 살리에리가 다 폰테에게 '빈 황실 결혼식을 위한 오페라를 작곡해야 하니 즉시 돌아오시오'라는 전갈을 보내서 다 폰테가 급하게 빈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모차르트가 이에 불만을 품은건 당연지사.
이처럼 두 사람은 이런저런 사유로 경쟁을 하고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위에 언급된 일화들은 동종업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하는 통상적인 갈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딱히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 대해 질투심을 갖고 있었다고 볼만한 사안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질투심을 가져야 될 사람은 오히려 모차르트였다.
5. 두 사람이 싸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계속 경쟁하고 갈등만 빚은 것은 아니었고 필요할 때는 나름 협력하는 사이였다. 살리에리는 1788년 궁정악장이 된 직후 황제 요제프 2세 앞에서 자신의 오페라 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했다. 또 1790년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취임 축제 기준 중에는 대관식 미사를 비롯 모차르트가 작곡한 몇곡의 미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2번 KV 482와 교향곡 40번 KV 550 등의 비인 연주를 주선했으며 후자의 경우 아예 살리에리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았다.
참고로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황제 요제프 2세가 배석한 야외 무대에서 모차르트가 직접 피아노와 지휘를 맡아 연주하는 곡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22번이다. 그런데 이 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집에 몰래 들어가서 피가로의 결혼 악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영화와 현실을 합치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집을 염탐하기 위해 일부러 피아노 협주곡 22번 초연을 주선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영화에 나오는 이 장면은 당연히 허구이다.
각설하고, 이처럼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이런저런 음악적 인연을 맺고 있었다. 모차르트 입장에서는 살리에리가 비인 음악계의 큰 손이자 황실의 악장이었기 때문에 본인이 아쉬울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살리에리였다. 또 살리에리 입장에서는 모차르트가 나름 황실 소속의 음악가였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싫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어떻게든 챙겨야 했다. 모차르트를 박대하는건 그를 선택한 황실에 반기를 드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1) 230년 만에 발굴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공동작품
2016년 2월에 프라하의 체코음악박물관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함께 작곡한 칸타타 '오필리아의 건강을 위하여'(Per la Ricuperata Salute di Offelia)라는 악보가 발견됐다. 이 칸타타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사람과 모두 인연이 깊었던 영국 출신 소프라노 낸시 스토리스(Nancy Strace)가 병으로 잃었던 목소리를 회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785년에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및 코르네티(Cornetti)라는 이름의의 미상의 음악가 3명이 오스트리아 궁정작가 로렌초 다 폰테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한 성악곡인데, 그간 곡의 존재만 알려져 있다가 드디어 발견된 것이다. ㄷㄷㄷ
약 4분 길이의 이 작품은 3개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목가적 스타일로 만들어진 첫째 부분은 살리에리가, 행진곡풍의 둘째 부분은 모차르트가 썼으며 코르네티가 작곡한 마지막 셋째 부분은 살리에리의 첫째 부분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코르네티가 누구인지는 베일에 쌓여 있는데, 살리에리가 일부러 자신을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가공의 작곡가라는 설도 있고 낸시 스토리스의 오빠이자 오페라 작곡가였던 스테판 스토리스(Stephen Storace)라는 설도 있다.
한편 이 곡의 제목에 나오는 오필리아는 살리에리의 오페라 트로포니오의 동굴(La Grotta di Trofonio)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원래 이 오페라의 초연때 낸시 스토리스가 오필리아의 역할을 맡기로 했으나 갑작스러운 성대 이상으로 하차해야 했다. 그래서 오필리아를 낸시를 상징하는 캐릭터로 정한 것이다.
곡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필요한 경우에는 이렇게 힘을 합칠 정도로 나름의 친분도 있었다는 것이다. 기록이나 편지를 보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협동으로 음악작업을 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물증이 없어서 이런 기록의 진위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었는데 이 곡의 발견으로 드디어 확인이 된 것이다.
(2) 오페라 '마술피리' 공연에 초대된 살리에리
개인적으로는 살리에리 관련해서 이 일화가 가장 흥미로운데, 모차르트가 죽기 불과 2달 전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1791년 10월 14일 아내에게 보낸 모차르트 생애 마지막 편지를 보면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와 소프라노 가수 카테리나 카발리에리(Caterina Cavalieri)를 초대해서 자신이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 공연을 같이 관람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차르트는 편지에서 살리에리가 공연 내내 오페라에 몰입했으며 자주 '브라보!' 같은 감탄사를 외쳤고 공연 후에도 '이것이 진정한 오페라이다!'라는 격찬을 했다고 뿌듯해 하고 있다.
물론 이런 행동을 그냥 의례적인 격려와 칭찬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살리에리가 마술피리에 열광할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 곳곳에서 살리에리의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파파게노와 파파게나의 2중창인 파-파-파(Pa-pa-pa)는 앞서 이야기한 살리에리의 오페라 '처음에는 음악으로, 다음에는 말로'에 나오는 '코쿠짜(Cocuzza)'를 패러디한 것이다. 또 2막의 마지막 4중창도 '처음에는 음악으로, 다음에는 말로'에 후반부에 나오는 4중창과 비슷하다. 살리에리 입장에서는 오페라 여기저기에 자신이 작곡한 곡의 모티브가 등장하니까 꽤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 애초에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를 공연에 초대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심지어 위키백과의 살리에리 항목에 보면 파파게노가 부는 휘슬 소리도 살리에리의 Bb장조 피아노 협주곡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솔직히 이건 잘 모르겠다. 2악장 후반부에 잠깐 나오는 피아노의 장식음이 휘슬소리와 비슷하긴 한데 글쎄올시다. ㅠ
여튼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에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렇게 좋았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의 곡을 패러디해서 존경심을 표현했고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훌륭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두 달만에 갑자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인다? ㄷㄷ 혹시나 두 사람이 알려지지 않은 금전관계나 치정관계 등으로 얽혀 있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최소한 현재까지는 밝혀진게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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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읽어도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의 진위여부에 대해 충분히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기 위해 남아 있는 몇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글이 너무 길어진 관계로 다음 글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다. 가급적 이번 글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막상 쓰고 보니 할 이야기가 상당히 많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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